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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촉사

관촉사가 품은 가장 빼어난 보물은 단연 은진미륵이다.
우리나라 최대의 석불로 유명하지만 시민들의 가슴에는 가정의 안녕과 행복을 염원하는 미륵불로 언제나 인자한 미소로 서 있다.
모나리자의 미소보다 더 아름답고 편안하며 자비로움이 베어있다.
논산에서 제일 먼저 가볼 수 있는 곳이 은진미륵으로 유명한 관촉사다. 들판에 젖무덤 같이 소담하게 부푼 반야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관촉사는 시내에서 1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다. 논산시에서 관촉사에 이르는 관촉로 주변으로 벚꽃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매년 4월경 꽃이 만개할 때면 벚꽃터널을 이루는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해 가족이나 연인들의 산책코스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관촉사에 가면 저렇게 낮고 조그만 산에 무슨 절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지만 경내에 들어서는 순간 너른 마당에 서있는 거대한 미륵불의 인자한 미소를 보는 순간 놀라고 만다.
보물 제218호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은진미륵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으며 높이가 18m로 석조불상으로는 동양 최대라고 한다.
이 보살 입상의 발 부분은 직접 암반위에 조각하였으며, 그 위에 허리의 아래부분, 상체와 머리부분을 각각 하나의 돌로 조각하여 연결하였다.
이 거대한 불상은 그 규모는 물론 토속적인 조각이라는 점에서도 단연 대표적인 작품으로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탑정호

눈을 뜨기 조차 힘들만큼 강렬한 빛속에서 논산시 한가운데에 자리한 탑정호는 옥토의 젓줄이다.
햇살은 따스함과 포근함으로 세상을 감싸지만 그 눈부심으로 가끔은 인간을 움츠리게 만든다.
그러나 그 태양을 향해 당당히 마주선 곳이 있다. 거기가 바로 탑정호이다.
수려한 대둔산의 물줄기를 담아내는 탑정호는 물이 맑기로도 유명하다. 그 곳에 가면 계절과 상관없이 근심이 풀어진다.
산은 강을 품고 강은 들을 품고 살지만 호수는 산과 강과 들을 품고 산다.
바다만큼이나 넓고 하늘만큼이나 깊은 호수가 바로 탑정호다.
탑정호는 서있는 위치에 따라 보는 맛이 다르다. 제일 권하고 싶은 곳은 부적 신풍리 쪽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 일 것이다. 호수를 깔고 서산으로 넘어가는 저녁노을을 보노라면 왜 논산이 노을의 고장인가를 알게 된다.
그 자리에 있어 본 사람은 잠시나마 여행의 피로를 풀게 되고 인생을 관조하게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높은 하늘의 거울이 되어 하늘과 호수의 두 가지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

대둔산

대둔산은 논산시를 비롯해 금산군과 전라북도 완주군이 경계를 이루면서 넓게 분포되어 있다.
대둔산은 논산의 동북쪽에 위치해 있고 계곡과 단풍으로 유명하다. 그중 군지계곡과 수락폭포는 소금강의 진수를 보여준다.
산은 날씨와 상관 없이 계절과 관계없이 그때 그 자리마다 아름답다는 것을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안다.
작은 금강산이라 불리는 대둔산은 더욱 그렇다. 대둔산 은 대개 기암괴석이 빼어나고 개발이 잘된 전북 운주 쪽을 떠올리게 되는데 대둔산은 충남의 논산과 금산, 전북의 완주 등 3개 시군에 속해 있다.

계백장군유적지

백제와 신라 “우국충정”의 대 격전, 황산벌 전투
계백(階白 ; ? -660)은 백제의 장군이다. 554년 성왕(聖王)이 관산성(管山城)에서 전사한 뒤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다. 641년 의자왕(義滋王)의 즉위이래 백제는 고구려와 제휴하면서 신라를 자주 공격했다.
그러나 고립된 신라가 당나라와 협력하여 고구려,백제 두 나라를 노리면서 상황은 크게 변했다. 결국 660년(의자왕20) 소정방(蘇定方)과 김유신(金庾信)의 나당 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炭峴)과 백강(白江)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의자왕은 계백에게 5,000명의 결사대를 주어 이를 막게 했다. 계백은 죽기를 각오하고 출전하여 1인당 100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4번을 싸워 이겼으나 백제군은 결국 중과부적으로 패배하여 계백이 전사했다. 이 황산벌 전투로 백제는 비운의 종말을 맞이했으며 계백장군은 통한을 품고 이곳에 묻혀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450여년 경의 일이다.
계백장군 묘는 장렬하게 전사한 계백장군의 충절어린 의로운 죽음을 보고 백제 유민들이 장군의 시신을 거두어 은밀하게 가매장 한 것이었다.
조선 숙종 6년(1680)에는 충곡서원이 건립되었는데, 계백장군 위패를 주향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왔다.
지금은 계백장군이 잠들어 있는 묘역을 중심으로 성역화사업이 진행중이며 계백장군의 위패를 모신 충장사에서 매년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또한 백제군사박물관이 개관되어 장군의 충의정신을 기리는 역사 문화 교육의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쌍계사

산길 끝에 암자가 있듯 명산에는 대찰이 있기 마련이다.
쌍계사 또한 대둔산 줄기의 불명산 기슭에 숨어있는 사찰이다.
절을 애워싼 산세가 범상치 않은 곳에 위치한 쌍계사는 인적은 없고, 산새 소리와 풍경소리만이 서로의 음을 조절하며 파장을 즐길 뿐이다.
특히 쌍계사는 대웅전의 꽂살무늬 창살로 유명한데 다가갈수록 고풍스런 정교함에 소리 없는 탄성이 가슴에서 울린다.
꽃무늬 창살로 유명한 쌍계사는 건립의 설화부터 신비하다.
먼 옛날 하늘나라 상제는 산수가 수려한 이땅에 절 하나를 짓기로 하고 아들을 내려 보냈다.
상제의 아들은 맑은 물이 계곡을 따라 흘러서 마치 신선이 사는 것 같기도 한 지금의 쌍계사 자리를 택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진귀한 나무를 모아 오도록 해서 그 나무로 절을 짓기 시작했다. 그래서 누구나 한번쯤은 쌍계사에 다녀가는 것이 소원이라고 할 만큼 화려하고 웅장했다.

개태사

논산 대전간 국도를 따라 연산사거리를 지나 오르막을 꺾어 내리다 오른쪽으로 마치 한옥의 지붕처럼 길게 뻗은 산이 보이는데 이 산이 바로 천호산이다.
이곳 천호산 자락에는 태조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 지었다는 개태사가 있다.
그냥 지나치기 쉬운 절이지만 전성기에는 1천여명의 승려가 도량하였고, 8만 9암자를 소속시켰던 고려시대 최대의 호국수호 사찰이다.
현재 진행중인 개태사지 복원 사업이 완료되면 전국적인 관광명소로 거듭 날 것이다.
병풍처럼 생긴 천호산 아래 하늘의 보호를 받아 자리한 개태사는 연산검문소를 지나 대전 방면으로 1㎞쯤가다보면 우측에 한눈에 들어오는 절이 보인다. 이곳이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의 꿈을 이루고 하명으로 지었다는 개태사다.
이러한 연유로 개태사는 고려 “대호국사찰”의 기능을 갖고 있었으며, 태조의 영정을 모시는 신전이었다.
대웅전에는 태조왕건이 후백제를 멸하고 마침내 3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후 조성했다는 삼존석물이 있다. 이 개태사의 삼존석불은 조선시대 이전의 불상 중 걸작에 속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키가 큰 주존불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좌협시불, 우협시불이 있다. 중앙의 본전불은 좌우 230㎝, 앞뒤216㎝ 방대형 대좌 위에 입상으로 되어 있다.

옥녀봉

유순한 금강이 흐르고, 아담한 옥녀봉과 채운산이 알맞은 거리를 두고 마주한 사이에 올망졸망 읍내가 보이는 강경!
「택리지」저자 이중환은 일찍이 강경의 풍물과 경치에 빠져 이곳에 살면서「택리지」를 집필하였다고 한다.
달 밝은 보름날 하늘나라 선녀들이 이 산마루에 내려와 경치의 아름다움을 즐겼고 맑은 강물에 목욕을 하며 놀았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강경에 가거든 젓갈시장을 들러 보고 꼭 옥녀봉에 올라가 보라고 권하고 싶다. 부여에서 유순하게 내려오던 금강이 옥녀봉을 밀어내지 못하고 물줄기가 꺾이어 서해로 나간다. 옥녀봉 정자에서 바라보면 사방이 거칠 것이 없이 훤하다. 논산평야가 한눈에 들어오고 부여, 익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논산 8경중 7경이라고 하나 풍류와 멋을 아는 사람은 이곳을 주저없이 1경으로 꼽는 이가 많다.
평야와 강이 조화를 이루고 저멀리 산이 배경처럼 서 있어 한폭의 수채화를 연상케 한다. 이곳에는 강경읍내와 멀리 논산시내, 드넓게 펼쳐진 논산평야와 금강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노성산성

노성산에는 노성산성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숲이 있고 새가 있고 바람이 있고 그 아래에 산성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산성에는 벌레가 살고 이끼가 살고 이끼가 살고 천년의 역사가 살아 숨쉰다.
논산은 산이 많지 않으면서도 산성이 많은 곳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곳 논산이 풍요로운 고장이라서 예부터 이땅을 차지하려는 싸움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방어와 공격의 수단으로 산성이 많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중 하나가 가장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노성산성이다. 노성산성은 산 정상부분을 돌로 둘러쌓아 만든 테뫼식 산성이다. 산 지형을 자연스럽게 이용하여 거의 완벽하게 쌓았고 동쪽면, 북쪽면, 서쪽면은 돌을 네모 모양으로 다듬어 쌓았다.
「신증둥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성 둘레는 590m, 높이 2.4m이다.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는 장수의 지휘대로 보이는 터(장대지)가 있으며 동쪽벽으로 조금 내려오면 봉화를 올리던 봉수대로 보이는 곳이 있다. 성 안에는 4개의 우물이 있는데 지금도 사용하고 있고 토기, 기와같은 여러 유물 조각들이 발견되고 있다. 연산에 있는 황산성과 함께 백제와 신라가 서로 마주했던 마지막 방어지에 해당하는 산성으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사용한 주요 방어지역이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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